자연과 우주 인간사를 보면 모두 대립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점을 찍었을 때 이 점은 우리의 눈에는 매우 미소하지만 무한히 작은 점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보는 점은 엄청난 크기의 공간이고 세계이다. 부자들의 입장에서는 더 큰 부자가 보이고 내 재산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테지만 가난한 이들에게서는 부자들의 재산은 엄청난 큰 재산일 것이다. 젊음과 늙음. 부유. 건강과 쇠약. 높음과 낮음.과거와 미래 우리의 언어는 상대적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상대적 언어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은 움직이고 늙음보다는 젊음을 추구하고 가난보다는 부를 추구하고 쇠약함보다는 건강을 추구하고 낮음 보다는 높음을 추구한다. 또한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사람은 많아도 만족하지 못할 수가 있지만 적어도 넘친다고 생각하고 고마워하고 만족할 수가 있다. 욕심을 작게 하면 무엇이든 채워지는 것이고 고맙지만, 욕심을 크게 하면 아무리 많이 받아도 고마워하지 않고 불평만 하게 된다. 하늘이 내게 준 것이 무엇인데? 내부모가 나한테 준 게 무엇인데, 내 부인이 내 남편이 나에게 해준 게 무엇인데 하면서 남탓을 하고 불평과 불만을 하고 신세한탄을 하게 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한 관념에 지배를 받는다. 언어가 사람들로 하여금 음보다는 양을 지향하게 하고 비움보다는 채움을 지향하게 한다. 우리는 생각을 한다. 생각을 이루는 요소는 이목비구를 통한 인지이다. 소리도 생각을 이루고 시각적인 모습도 생각을 이루어준다. 냄새도 생각을 이루고 맛도 생각을 일으킨다. 우리가 이루는 생각 즉 사고는 한점에서 선으로 확장시켜야 한다.
부자를 보면 그 부를 볼 것이 아니고 그 부가 어떤 선으로 이루어졌나를 보아야한다. 그래야 부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맛있는 음식을 대하면 그맛을 느끼고 감각을 즐기는 것은 한 점이요 이 맛의 근원이 어디서 왔는가 생각하는 것은 한 선이다. 사람은 점에서 머물면 그만큼 감각적인간이 된다. 하지만 선으로 확장하려 하면 사유하는 인간이 된다. 동물은 배를 채우기 위해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배를 채우고 나면 생각을 그친다. 동물은 추우면 추위를 피하려고 생각하지만 몸을 덮힐 장소를 찾고나면 생각을 그친다. 동물은 자신을 위협하는 더 큰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긴장하고 눈치를 살피고 하지만 이러한 위험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생각을 그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배를 채우고 나서 생각을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이 따스해지고 나면 생각을 그치지 않고 위협이 사라졌다고 생각을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유하기 때문에 동물과 다르다. 그 생각은 감각의 결핍과 고통에서 감각의 충족과 만족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생각을 감각에 지배받게 하면 동물에서 크게 낫지 않다.
나의 쇠약함을 한탄하지 말고 나의 쇠약함이 어디서 왔는가 살펴보아야 한다. 나의 가난을 한탄하지 말고 나의 가난이 어디서 왔는가 살펴야 한다. 부자의 부를 욕하지 말고 그부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나무의 잎을 보면 잎의 형태에 머물지 말고 이잎의 연장선을 살펴야 한다. 가지는 어떻고 줄기는 어떻고 뿌리는 어떨 것인지? 건강을 잃은 사람들은 현재의 상태가 왜 왔는지 생각을 해야 한다. 나의 운명이 나의 팔자가 나의 건강을 잃게 한 것인가 ? 내가 잘못된 습관속에 빠져있어서 이렇게 된 것인가 ? 이렇게 고생하다가 건강까지 잃은 것인가? 나의 무절제가 나의 건강을 잃게 한 것인가?
사상의학을 창시하신 동무공께서는 바로 이러한 생각의 확장을 통해서 사물의 진체에 빠져들어가게 된다. 이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음양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인지는 나자신의 감각으로 향해 있지 않고 사물의 궁극적인 모습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였다. 그의 인지는 감각에 그치지 않았다 그 감각의 근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의문을 품고 끊임없는 사유를 하였다. 사람들의 걷는 모습에도 큰 차이가 보였고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도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의 기호에도 큰 차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들의 병증에도 큰 차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무공은 출생에서 부터 불우하였다. 그의 부친이 주모의 딸과 하루밤을 지낸 것이 동무공을 탄생하게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꿈에 백마가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보았다. 필히 오늘은 좋은 꿈을 꾸었으니 좋은 일이 있을 터인데 하고 잠에서 깨어보니 왠 아낙이 문을 두드리고 서있다. 애기를 보에 업고 문을 두드린 것이다. 동무공의 부친은 누구 자식인지 하였고 할아버지께서 꿈이 상서로워 동무공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동무공을 제마라고 이름지으신 것은 한문으로 건널제濟 말마馬에서 본딴 것이다. 이 진사댁의 자손이지만 당시로 말하면 서얼 즉 첩의 자식이었고 크게 환대받지를 못하였다. 아버지는 자식 얼굴도 보려고 안했고, 모친은 구박덩이로 살았다. 양반집 자손이지만 서얼의 차별로 인하여서 공부를 해보아야 소용이 없었고 당시에는 서얼은 문과 급제를 하여서 과거로 나갈 수가 없었고 무과만이 허용되었다. 어차피 노력해보아야 소용도 없는 차별된 한계가 동무공을 삶과 미래에 대한 큰 벽에 부딪히게 하였고 그의 감각적사고는 인지적사유로 바뀌게 된다. 사람은 큰 한계에 부딪힐 때 큰 충격에 부딪힐 때 좌절을 하지만 이 좌절이 사물과 인생에 대한 진체를 깨닫게도 한다.
동물처럼 오관의 만족함에서 그치게 하지 않고 동무공의 인생에 대한 한계가 그의 사고를 확장시키기 시작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제의 한계를 훌훌 벗어버리고 사유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고시공부인 문과급제를 하고 출세의 길을 가는 게 아니고 자연과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의심을 품고 세상을 방황하게 된다. 동무공께서 정평가는 길에 하루밤 어느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벽에 바른 종이를 보니 대단한 글이 써있었다. 그간 생각하던 의구심이 이 글을 보는 순간 탁 터지게 되었고 사유의 근원을 깨닫게 된다. 주인께 이야기 하여서 이글을 내가 갖겠노라고 허락을 얻고 하루밤새 찬물을 입에 물고 뿜어내어서 벽지의 마른 풀을 적셔서 뜯어내고 하기를 온밤을 하여서 다시 책으로 엮은 것이 한석지 선생의 명선록이었다.
깨달음은 시공을 통해 있고 추구하면 진정으로 만나게 된다. 감각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한 점의 생각 외에는 다시금 본능만 있는 동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감각의 만족을 위한 선택을 하게 되며 이 선택은 결국은 자신을 속이고 망치게 된다. 깨닫고자 하면 어디나 깨달음의 생각이 일어나게 된다. 동무공께서는 명선록에 쓰여진 좌우봉원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좌우봉원이란 좌우에서 즉 흔한 일상사에서 근원을 만난다는 뜻이다. 새로운 사유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새롭고 모두가 스승이다. 그의 기쁨은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서 즉 평범 속에 진리가 있는 것을 알고 환희로 변하였다. 추구하는 자는 스승을 만나게 된다. 추구하는 마음이 시공의 벽을 넘어서 스승을 만나게 한 것이다.
일찍이 송대의 소강절은 황극경세서를 써서 역학의 큰 줄기를 이루게 되었는데 어초문대를 보면 천지사물에 대한 음양론을 피력하고 있다. 모친을 장사를 지내고 탈상을 하고 나서 소강절은 역시 자연과 역수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다가 기와를 베고 잠을 자는데 늙은 쥐 한마리가 소강절의 배를 밟고 지나간다. 놀라서 깨어난 소강절은 베고 있던 기와 벼게를 늙은 쥐를 향해서 던지는데 기와가 깨지면서 글이 나타난다. 모월 모일 모시에 이 기와는 늙은쥐때문에 깨질것이라고 그 기와에 글이 새겨진채로 구워졌던것이다. 이 글을 발견한 소강절은 깜작놀라서 이 기와 베개를 구운 사람을 찾아나섰다.
이리 저리 물어서 그 집을 찾으니 이미 그 집에서는 소강절이 올 것을 알고 있고 준비상을 차려놓터이다. 말인즉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모월모일 모시에 한 선객(仙客)이 찾아올 것이다. 그가 오면 필히 이 책을 건네주라고 당부하였던 것이다.
그 첵을 받아들고 의자에 앉아있는데 의자가 삐걱하면서 부서진다. 소강절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면서 책의 쓰여진 원리를 살펴 그 수를 보니 의자 밑에 마루 속에 할아버지가 큰 보화를 숨겨놓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주인에게 보화를 찾아주고 소강절은 그 책을 얻어 자신의 학문을 한층 정묘한 경지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우화이지만 우리는 두가지를 알 수 있다. 하나는 추구하는 것이 절실하고 극에 도달하면 하나의 벽이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우리는 벾을 뚫고 가야 한다. 생이라는 벽을 뚫고 가야 한다. 이 벽은 나를 둘러쌓고 나의 가슴을 조이고 나를 좌절하게 한다. 하지만 이 벽을 뜷으려고 노력하면 어느날 한순간에 정성이 쌓여서 벽이 무너지게 된다.
그 만남은 우연이라고 보이지만 물이 가득차야 넘치듯이 정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이우화는 음양의 상대성을 보여준다. 세상은 수수지도이다. 하나를 얻어가면서 반드시 하나의 좋은 일을 해주어야 한다. 그게 음양의 법칙이다.
선객을 대접 안하였더라면 그 조상이 숨겨놓은 보화도 그 자손에게 가지 않았을 것이다. 공덕이 없이 얻은 재물은 다 흩어지게 마련이다. 조그마한 인과라도 만들어야 그 보화를 받을 수가 있다. 선객에 책을 건네준 공덕이 그 재물을 받게 한 필연을 만들게 한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미신을 조장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겪은 일을 한번 이야기 해보겠다.
내 환자 중에 유방암 환자가 한분이 있는데 이 분의 체질은 소양인이 었다. 일반적으로 유방암에 상용되는 약물들은 대부분이 음인 약물로 생각한다. 유방암의 2기 환자는 처음에는 AC 라고 불리우는 아드리아 마이신과 cyclophosphamide 라는 약물을 사용하고 나서 이후에 taxol 이라는 약물을 사용한다. 이후 연속으로 방사선 치료를 끝내고 나서는 그리고 호르몬 수용체가 있는 경우는 tamoxifen 이나 arimidex 라는 항호르몬제를 사용하고 더해서 zoladex 라는 에스트로겐 억제약물을 사용한다. 최근에는 herceptin 이라는 수용체를 검사하여서 이에 관한 수용체가 있는 경우는 이 약물로 기존치료를 대체한다.
하지만 위의 약물 중에 arimidex 라 zoladex 외에는 모두 음인 약물이다. 두가지는 소양인에게 적합하고 태양인에게 맞는 약물은 아예 없다. 그나마 이러한 호르몬제는 완만한 성향이지만 소음인약물은 AC 나 태음인 약물인 taxol 은 매우 강력한 약들이다. 암을 수술하면 많은 분들이 완치되기를 희망하지만 암세포는 조그마한 동전크기라도 그 안에 수억의 세포가 있다. 수술로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치료를 거부하는 분 중에 암세포가 수술 이후에 뿌려진 것을 항암을 통해서 눌러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서 한 두해가 지나면 재발을 하여 안타까운 분들이 있다. 항암을 안하더라도 본인이 열심히 운동과 수양을 통해서 건전한 생활을 하면서 이기는 분들도 있지만. 항암제가 흩뿌려진 씨앗을 눌러주어서 재발은 안하는 분들도 많다. 하지만 체질을 고려하지 않은 항암방법도 문제가 있다. 유방암환자 중에 비율이 적은 소양인은 이러한 적합치 않은 항암방법이 수술 이후에 오히려 재발을 더 빨리 유도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oncogen 검사를 통해서 이러한 소양인들은 항암이 별로 효용이 없다고 나와서 다행히 틀린 항암에 의한 피해를 빗겨가기도 하지만, 의사분들도 느끼는 가끔은 일상적인 항암예후와 다르게 매우 빨리 급진전되는 경우를 보게될 것이다. 이러한 경우가 바로 양인들의 경우이다.
이 환자도 표준치료를 하는 도중 다시 재발하여 내게 와서 치료를 끝내고 완치가 되어서 이미 10년 넘은 세월을 잘 지내고 있는데 그분의 동생도 위암이 걸려서 다시금 내게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모친이 와서 내가 이 가족은 왜 이리 한약을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그 어머니가 시집와서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내가 시집오고나서 시아버지가 배가 남산만큼 부르고 한 신장병을 앓았는데 당시 약들이 없던시절이라 병원도 못가고 돌아가시기만 기다렸다고 한다. 갓 시집와서 시어른이 아프니 마음 속으로 걱정이 되고 하여서 빌기를 거듭하는데 하룻밤 꿈에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서 내일 아침 사립문에 동틀적에 누가 찾아올 터이니 그 사람 시키는대로 하라고 일러주고 갔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나서 보니 정말로 아침햇살이 사립문으로 들어오는데 아랫동네 사람이 문을 두드린 것이다. 사연인즉 이 집에 환자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 내가 부러 찾아왔노라 하면서 자기 집안에 똑같은 병을 앓은 어른이 계셨는데 이러이러한 처방을 먹고 나아졌다고 하면서 일러주더란다. 그가 시키는대로 하였더니 정말로 시아버지께서 병세가 잠차 나아지기 시작하여 배가 가라앉고 나아져서 80 이 넘게 천수를 누리고 건강하게 사시다가 가셨다고 한다. 내가 그 처방을 물으니 할머니께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랫마을 사람이 일러준 처방이 댕댕이 덩굴을 삶아서 그 물로 식혜를 만들어서 드리고 보리밥을 드시게 하라고 하였단다. 그래서 일러주는 대로 식혜와 보리밥을 드셨는데 깡보리밥을 몇가마를 드셨다고 한다. 이집은 소양인 집인데 그 처방도 소양인 처방이 었다. 하나님 부처님하고 천지신명께 기도드리지만 정성이 이 같은 만남을 해준 것이고 요행을 바라지 않는 진심이 진정한 만남을 갖게 한 것이다. 과학의 눈으로 보면 미신이라고 하겠지만 동양의 명의들은 모두 절실한 삶은 가진 분들이었다. 상한론을 지은 중경선생께서는 당시 역질이 돌아가 장가장 (당시는 마을로 일가 친적이 모두 한 데 살아서 莊이라고 불리운다) 일가의 삼분의 이가 모두 역질로 돌아가셨고 부인도 역질로 사망하였다. 이러한 역경이 마음에 맺힌 한이 중경선생으로 하여금 한의학의 변증 처방의 남상인 상한론을 쓰게 한 것이다. 역대의 명인들의 처방 하나도 몸소 실험하고 추구하고 빌고 하는 과정에서 터득되고 알아진 것이다. 서양은 동물실험에 그치지만 동양의 명의들은 자신을 실험도구로 삼았다. 동무공은 매일 산에 가서 약초를 씹다가 독을 만나서 쓰러져있고 하면 사람들이 찾아서 실어왔다고 한다. 이같은 대단한 탐구정신이 사상의학을 낳은 것이지 책상머리에서 생각만으로 말을 지어내는 허구가 한의학이 아니다.
무슨 약 하나를 먹으면 내병이 낫겠지 무슨 건강식품을 찾으면 내 건강이 낫겠지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건강을 지켜주는 것은 나의 올바른 생각이요 감각적 사고를 버리고 나를 관찰하고 나의 습관을 바꿈으로써 건강이 얻어진다.
더더욱 복을 받고 싶으면 작은 복짓는 일이라도 하여야 한다. 자신만을 위해 내 가족만을 위하고 자신의 욕심으로 남을 해치면 결코 복과 건강이 얻어질 수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연히 이루어진 병이나 남이 얻어가진 우연히 얻은 건강이라고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필연의 결과 인 것이다.
감동적인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작은 복이라도 쌓으며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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