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터넷으로 글을 쓰기시작한 데는 나 나름대로 목적과 이유가 있다. 하나는 사상의학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상의학의 우수성을 통해서 독자들이 건강을 지키게 하는 목적이고 또 하나는 음양학은 고전의 언어가 아닌 우리 실생활에서 알고 이해시킬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며 우리 문화 자체가 음양을 바탕에 깔고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이다. 그래서 사상에 관심있는 분들이 음양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초부터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우선 음과 양을 정의해 보자. 우리는 태극기를 국기로 하고 있는 나라이다. 박영효가 일본에 수신사로 갈 때 태극기를 급히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미 태극기를 그 전에 조미수호통상조약 때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국기는 바로 음양변화를 표식으로 삼았고 동양에서 말하는 자연의 원리인 태극음양론을 대표로 삼고 있다.
나를 중심점으로 잡으면 내게서 나가는 것이 양이고 내게로 향하는 것이 음이다. 음과 양은 힘의 벡터 즉 에너지의 방향성이다. 자연은 팽창과 수렴을 거듭한다. 음식문화가 다양하게 발전된 중국에서는 큰 나무 도마를 사용하는데 나무가 마르면서 갈라지면 차차 터져서 벌어지게 된다. 이때 돼지 생가죽을 벌어진 양쪽에 못으로 박아놓으면 이 가죽이 차차 마르면서 오그라드는힘이 그 벌어지는 도마의 양쪽을 붙게 한다. 돼지는 십이지에서 해(亥)이다. 옆에 나무목(木)자를 붙히면 핵(核)이 된다 씨앗이라는 뜻이다 하나의 씨앗이 싹이 나와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서 무성해지지만 다시금 그 씨앗으로 돌아간다. 엄청난 응축된 에너지를 말한다. 돼지의 이같은 응축시키는 성질은 한의학에서는 차다고 표현하여서 열이 없는 음인들은 돼지고기를 먹고 설사를 하고 체하고 토사곽란을 일으킨다. 그래서 소금의 열기로 이를 풀기 때문에 돼지고기 먹고 체하면 새우젓을 먹으라는 것은 수기에 해당하는 돼지를 토기로 푼다는 (토극수)의 원리로 말한 것이지만. 이러한 음성적으로 당기는 힘을 이용해서 갑자기 눌러도 눌러지지 않는 벌어진 나무도마가 매일매일 조금씩 말라가면서 오그라드는 돼지가죽의 핵의 힘을 이용해서 붙이는것이 동양의 지혜이며 자연의 힘을 비는 방법이다. 도끼로 나무를 쪼개는 것은 결을 따라야 한다. 결을 따르면 바로 쪼개지지만 결을 따르지 않으면 힘만 들고 날만 무뎌진다. 자연은 결을 가지고 있다. 음과 양이라는 결을 가지고 있다. 사상학은 이러한 결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상일 뿐이다. 아무리 무한분열을 하여도 사상의 틀에 있는 것이다. 봄의 날씨가 쌀쌀하기도 하고 따스하기도 하고 여름처럼 더울 때도 있지만 봄의 틀 안에서 움직이지 여름이 되지는 않는다. 겨울이 아무리 따스하고 포근해도 겨울은 겨울일 뿐이다 사상의 틀 안에서 변화가 있는 것이지 이를 벗어난다는 것은 기초를 모르는것이다.
음양은 손가락하나의 움직임에도 있고. 자세에도 있고 마음의 방향에도 있다. 그래서 마음을 따라 때론 음으로 때론 양으로 작용을 한다. 손바닥으로 쥐고 있는 것이 음이고 손바닥을 펴고 있는 것이 양이다. 내것을 남에게 줄 때는 손바닥이 하늘을 향한다. 내가 남의 것을 가져올 때는 손바닥이 땅으로 향한다. 줄 때는 고개와 턱이 하늘을 향하지만 뺏어올 때는 턱이 몸에 붙는다. 더더욱 뺏기지 않으려 할 때는 목에 힘을 주어서 턱을 끌어당긴다.

주려고 하는 마음이 태양이요 펄쳐보이고 놓아버리는 것이 소양이다. 거두려고 하고 뺏으려고 하는 것이 태음이요 소중한 것을 뺏기지 않으려고 잘 간직하려고 꽉 쥐고 있을 때는 소음이 된다. 자연은 바로 이같이 사상의 마음을 이용해서 초목을 성장시키며 꽃을 피워 온갖 화려한 연초록의 봄을 만들고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게 한다. 가을이 되면 숙살한기운으로 열매를 맺어 거두게 하고 겨울은 모든 것을 빼앗아버리고 대지는 조용하고 땅과 물은 얼어버린다.
봄여름은 따스한 기운으로 모든 것을 느슨히 풀어놓고 초목은 쑥쑥 자라오른다. 싹이 트고 잎새가 벌어지고 열매를 맺는다 이과정이 양의 과정이다. 가을이 오면 열매가 익어 떨어지고 결실을 하게 되고 추수를 하게 된다. 겨울이 오면 그간 내놓았던 것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뺏어간다. 이 과정이 음이다. 동양은 거대한 중국이라는 황하강 유역에 자리잡은 농경문화에서 출발하였다. 24 절기에 따라 씨뿌리고 김매고 거두는 과정에서, 바로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과정에서 농사가 성공하고 생활이 가능하였다. 동양학의 기초는 易에 있다. 주역이라는 책으로 써졌지만 이는 바뀐다는 뜻이다. 변화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 주역이었다.
아침에 직장으로 나가려 할 때는 양의 마음이 일어나서 의욕을 가지고 일을 만나게 하고 저녁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음의 마음이 일어나서 귀가를 서두르게 한다. 새들이 마치 낮에 분주히 모이를 찾다가 밤이 되어서 둥지로 모아드는 것과 같다. 세상만사는 모두 음양의 틀에서 움직인다. 밤과 낮이 교차하고 추위와 더위가 어느덧 바뀌어서 짧은팔을 입다가 두툼한 옷을 찾게 한다. 사상의학의 기초는 바로 이 자연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음인과 양인이 다름은 동서양 만큼이나 다르다. 가족을 중심으로 모이고 가족을 책임지려고 하고 자손에게 무엇이라도 물려주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 동양인들의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어려서부터 다른 방에 재우고 독립심을 키워주려고 하고 학비는 네가 알아서 벌어 학교를 다니라고 내던지는 것은 서양인들에게 익숙한 사고 방식이다.
나는 한때 목공에 취미를 두고 목수 일을 배운 적이 있다. 혼자서 연장을 사다놓고 이리저리 만들어 보고 책장도 내가 원하는대로 만들어 보고 의자도 만들어 보고 하였는데 배우지 않고 생각대로 만 하니까 무엇 하나 제대로 서지 못하고 흔들거리고 하였다. 그래서 길거리 다니다가 공사장이 있으면 커피를 사들고 가서 구경하겠노라 하고 앉아서 목수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한 수 배워서 내 작업실에 와서 만들어 보고 하였다. 6개월이 지나도 만족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루는 공사장에 앉아 있는데 목수 한 분이 내 손을 보더니 웃으면서 나더러 이리 와 보라고 한다. 마침 망치질을 하다가 잘못 엄지 손가락을 때려서 엄지 손톱 밑이 새까맣게 된 것을 이 분이 보았다. 내게 못질을 가르쳐주는데 못을 세워서 망치로 두드려서 뾰족한 끝을 무디게 만들더니 나무에 박는다. 마른 나무가 뾰족한 못이 들어가면 못이 쐐기처럼 나무 끝을 갈라놓아서 나무가 쪼개진다. 그런데 뭉뚝한 못이 들어가면 나무가 벌어지지 않는다. 몇일 동안 귀가 길에 들려서 목수가 못을 두드리는 것을 보았는데 눈썰미가 없어서인지 그냥 구부러진 못을 펴서 쓰나 무심코 넘어갔다. 몇일 출석을 하니까 기특했던지 불러서 못 끝을 두드려서 박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동안 눈을 뜨고도 그 사소한 것 하나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목재를 사러 목재소에 들렸는데 나이가 많이 드신 조선목수일을 하셨던 분이 이제는 허리가 아프고 몸도 쇠하고 하여서 목재소에서 야간을 지키면서 책꽃이를 만드는 것을 보게 되었다.
미리 썰어놓은 널판을 양쪽에 기둥판 사이에 넣고 못질을 하는데 톱으로 나무토막 하나를 썰더니 이를 짜개로 둘로 쪼갠다. 한 나무에서 짜게로 둘로 자르니 이 둘은 길이가 똑같다. 판사이 양쪽 면에 이 한조각에서 쪼갠 두조각을 넣고 조기대로 삼아 두번째 널을 눌러서 양쪽에 못을 박는데 몇 칸을 만들어도 똑 같은 크기를 만들었다. 몇 시간을 서서 이 목수분의 일 하는 것을 보았는데 모두 다 신기에 가깝다. 보통은 자를 들이대서 연필로 그어대고 거기다가 못을 치거나 타카를 치는데 이 분은 자를 사용치도 않코 한 나무조각을 쪼개 둘로 만들어서 사용한다. 얼마나 연구 했으면 저 생각을 해냈을까 일반적으로 연필로 그으면 아무리 똑같아도 조금씩은 자가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고 못을 때리는 순간 진동으로도 조금은 차이가 난다. 같은 조기대로 받쳐서 널을 밀어넣고 못을 박으니 흔들림이 없이 양면이 똑같은 길이가 된다. 나를 대견히 생각하셨던지 불러서 이것 저것 가르쳐주는데 그 날 머리에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백문이 불여일견(百聞이 不如一見)이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내 스스로 또 한마디 대구를 지어 보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요 백사가 불여일학이다(百思 가 不如一學). 백번 듣는것이 한번 보는 것만 못하고 백번 생각하는 것이 한번 배우는 것만 못하다. 몇개월 동안 혼자 생각하고 실험해 보아도 해결 안되던 것들이 이 노인의 어깨넘어에서 잠시 보는 사이에 그간 의심이 모두 풀어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어왔다. 백문이 불여일견인데 백번 들었었길래 백번 듣고 어떨까 생각하다가 한번 보니 바로 보였던 것이고 . 백사가 불여일학(백번생각하는것이 한번 배움만 못하다)은 백번 생각하고 궁리하다가 나가서 배워보니 이제껏 잘못 되었던 것들이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바른 것인 지 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기실 몇 개월 동안 이것 저것 해보면서 왜 안될까 하는 생각으로 고민하고 하였길래 그 노목수분이 작업에서 번뜩 번뜩 ” 아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 하고 생각이 들어왔지, 만약 그 시간의 낭비가 없었더라면 또 평범한 못질로 보고 넘어갔을 터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도대체 얼마나 똑같이 선을 그을려고 생각했길레 한 나무를 썰어서 두개로 쪼개서 이를 조기대로 사용하는 생각을 했겠는가 하니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볼 수있는 눈은 사물을 진정으로 연구하는데 있다고 보겠다.
동양과 서양은 톱질 하나도 틀리고 대패질 하나도 틀리다. 서양 대패는 미는 방향으로 되어 있다 자신을 중심으로 앞으로 밀면서 깎는다.

동양의 대패는 뒤로 잡아 당긴다. 내 몸을 중심으로 하여서 잡아끄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미는 양의 방향과 당기는 음의 방향조차 다르다. 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톱은 잡아당기면서 써는데 서양 톱은 밀면서 썬다. 양인이 비율이 많은 서양은 표현하고 밀고 빠꾸고 헤쳐나가는 방식으로 문화가 이루어져 있고. 끌어당기는 에너지가 많은 동양의 문화는 감추고 당기고 보존하고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같은 동서양의 차이가 바로 음인과 양인의 차이이며 양인이 많은 서양인은 사고 방식과 그들의 건강에 대한 약물도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음인이 많은 동양인들의 사고와 약물도 또한 이와 다르게 발전되어 왔다.
사상학은 이같이 음과 양의 다름을 가르친다. 평범한 가운데 음과 양이 나뉘어서 서로간의 역할을 하면서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게 한다. 나와 다르지만 내게 없지만 그 요소가 부분인 나를 전체가 되게 가르친다. 서로 음양이 만나서 서로의 기운을 받으면서 하나로 화락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을 가르친다. 늙음은 젊음의 용기를 부러워하게 하고 젊음은 늚음의 지혜를 배우게 한다. 체질은 태소음양인이 다르지만 태소음양인이 각기 천시사무 세회교우 인륜당여와 지방거처를 이루는 것을 가르친다. 태소음양인의 이목구비는 천시를 듣고 세회를 보고 인륜을 냄새 맡고 지방을 맛보며, 태소음양인의 폐비간신은 사무를 이루고 교우를 맺으며 당여를 정제하고 거처를 확립하는 것을 가르친다.